페르난두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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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난두 1세는 1367년 부왕 페드루 1세의 뒤를 이어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그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교황의 중재로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카스티야 왕의 딸과 결혼할 뻔했으나, 레오노르 텔레즈와 결혼하기 위해 이를 무효화했다. 1382년에는 딸 베아트리스를 카스티야 왕 후안 1세와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으나, 1383년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왕가의 남계 직계는 단절되었다. 그의 사망 이후 포르투갈은 혼란에 빠졌으며, 그의 배다른 형제 주앙 1세가 왕위를 차지하며 아비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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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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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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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포르투갈의 군주 |
별칭 | 아름다운 자 (o Formoso) 변덕스러운 자 (o Inconstante) |
로마자 표기 | Fernando |
IPA | fɨɾˈnɐ̃du |
통치 | |
즉위 | 1367년 1월 18일 |
퇴위 | 1383년 10월 22일 |
선임자 | 페드루 1세 |
후임자 | 베아트리스 (논쟁 중) 또는 주앙 1세 |
갈리시아 왕 재위 | 1369년 - 1373년 |
갈리시아 왕 선임자 | 페드로 데 카스티야 |
갈리시아 왕 후임자 | 엔리케 2세 |
가문 | |
왕가 | 부르고뉴 |
아버지 | 페드루 1세 |
어머니 | 콘스탄차 마누엘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레오노르 텔레스 (1372년 결혼) |
자녀 | 베아트리스,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여왕 (서자) 이자벨, 기혼과 노레냐 여백작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345년 10월 31일 |
출생지 | 코임브라, 포르투갈 |
사망일 | 1383년 10월 22일 (37세) |
사망지 | 리스본, 포르투갈 |
매장지 | 카르모 수도원, 리스본 |
2. 생애
페르난두 1세는 코임브라에서 페드루 1세와 그의 아내 코스탄사 마누엘의 둘째 아들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2] 1383년 10월 22일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엔히크 디 포르투갈 백작으로부터 내려오던 보르고냐 왕가의 남계 직계는 단절되었다.[8] 그의 사후,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이복 형제 주앙이 왕위를 주장하며 내전을 일으켰고, 1385년 왕위에 올라 아비스 왕조를 열었다.
페르난두 1세의 무덤은 리스본의 카르무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페르난두는 페드루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2] 1367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1369년 카스티야의 왕 페드로가 사망한 후, 페르난두는 외가쪽으로 산초 4세의 증손자로서 빈 왕위의 소유권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아라곤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왕들과 페드로의 사위인 랭커스터 공작 존과 경쟁해야 했다.[3] 그동안 페드로의 배다른 형제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가 카스티야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는 또 다른 갈등을 불러왔다.몇 번의 전쟁 끝에 모든 세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371년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는 페르난두와 엔리케 2세의 딸인 레오노르 공주와의 결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두가 자신의 가신의 아내인 레오노르 텔레즈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레오노르 텔레즈는 이전 혼인을 무효화한 후 페르난두와 결혼하였다.[3][2]
2. 2. 카스티야 왕위 계승 분쟁과 전쟁
13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왕 페드로가 사망하자, 페르난두는 외가 쪽으로 산초 4세의 증손자라는 점을 들어 비어있는 왕위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아라곤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왕들, 그리고 페드로의 사위인 랭커스터 공작 존과 경쟁해야 했다.[8] 그동안 페드로의 배다른 형제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가 카스티야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또 다른 갈등을 일으켰다.[9]몇 번의 전쟁 끝에 모든 세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1371년에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에는 페르난두와 엔리케 2세의 딸인 레오노르 공주와의 결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두는 자신의 가신의 아내인 레오노르 텔레즈와 사랑에 빠졌고, 레오노르 텔레즈는 이전 결혼을 무효로 한 후 페르난두와 결혼했다.[8][9]
이러한 행동은 포르투갈에서 대규모 봉기로 이어졌지만, 곧바로 엔리케 2세와의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엔리케 2세를 몰아내기 위해 페르난두와 비밀 조약을 맺었던 랭커스터 공작 존의 계략으로 인해 페르난두와 엔리케 2세 간의 평화는 깨졌고,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1373년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1379년 엔리케 2세가 사망하자 존은 다시 카스티야 왕위를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포르투갈 내에도 동맹 세력을 심어두었다. 그러나 존의 군대는 페르난두의 군대뿐만 아니라 동맹군의 군대에 대해서도 공격적이었다. 페르난두는 1382년 바다호스에서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 조약에는 페르난두의 딸인 베아트리스와 카스티야의 왕 후안 1세의 결혼이 명시되어 있었다.
2. 3. 레오노르 텔레스와의 결혼과 내분
1367년 아버지 페드루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3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왕 페드로가 사망하자, 페르난두는 외가 쪽으로 산초 4세의 증손자라는 점을 내세워 비어있는 왕위를 주장하였다. 아라곤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왕들과 페드로의 사위인 랭커스터 공작 존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한편, 페드로의 배다른 형제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가 카스티야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또 다른 갈등을 낳았다.몇 차례의 전쟁 끝에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를 받았다. 1371년 조약에는 페르난두와 엔리케 2세의 딸인 레오노르 공주와의 결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두는 자신의 가신(家臣)의 아내인 레오노르 텔레즈와 사랑에 빠졌고, 레오노르 텔레즈는 이전 혼인을 무효로 한 후 페르난두와 결혼하였다.[8][9]
이러한 행동은 포르투갈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엔리케 2세를 몰아내기 위해 페르난두와 비밀 조약을 맺었던 랭커스터 공작 존의 계략으로 인해 페르난두와 엔리케 2세 간의 화의는 깨졌고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1373년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1379년 엔리케 2세가 사망하자, 존은 카스티야 왕위 소유권을 다시 주장하며 포르투갈 내에 동맹 세력을 심어두었다. 그러나 존의 군대는 페르난두의 군대뿐만 아니라 동맹군의 군대에 대해서도 공격적이었다. 페르난두는 1382년 바다호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으며, 조약에는 페르난두의 딸 베아트리스와 카스티야 왕 후안 1세의 결혼이 명시되었다.
페르난두는 평민 출신이자 유부녀인 레오노르 테르스와 사랑에 빠져 이혼시키고 결혼했다. 이에 반대하여 리스본에서 폭동이 일어났지만, 주모자는 왕비 레오노르의 명령에 의해 처형되었다.
1372년, 카스티야 왕녀 콘스탄사(페드로 1세의 차녀)를 아내로 둔 잉글랜드 왕자 존 오브 곤트와 동맹을 맺고, 존이 카스티야의 왕위를 노리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엔리케 2세에게 해상과 육지 양쪽에서 리스본이 포위당하고, 시민들은 잘 견뎌냈지만, 페르난두는 이듬해인 1373년에 강화 조약을 맺고 카스티야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1381년, 다시 존 오브 곤트와 동맹을 맺고 카스티야를 침공했지만, 다시 카스티야 군에게 침략당했고, 같은 해 살테스의 해전에서도 패배했다. 이때의 강화 조약으로, 첫 번째 왕비를 잃었던 카스티야 왕 후안 1세(엔리케 2세의 아들)의 후처로, 레오노르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왕에게는 베아트리스 왕녀 외에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양국 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계약이 체결되었다.
# 포르투갈 왕위는 페르난두 1세의 적자 남자가 계승한다.
# 적자 남자가 없을 때는, 카스티야 왕비 베아트리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 베아트리스가 적자 남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 페르난두 1세의 다른 왕녀 또는 그 왕녀의 적자 후손이 계승한다.
# 페르난두 1세에게 자손이 없고, 베아트리스에게 자손이 없는 경우, 카스티야 왕이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한다.
# 카스티야 왕과 그 여동생이 적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경우, 포르투갈 왕이 카스티야 왕위를 계승한다.
2. 4. 잉글랜드와의 동맹과 재차 전쟁
1367년 아버지 페드루 1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13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왕 페드로가 사망하자, 페르난두는 외가쪽으로 산초 4세의 증손자로서 빈 왕위의 소유권을 주장하였고, 아라곤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왕들과 페드로의 사위인 랭커스터 공작 존과 경쟁해야 했다. 그동안 페드로의 배다른 형제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가 카스티야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는 또 다른 갈등을 불러왔다.[3]몇 번의 전쟁 끝에 모든 세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1371년 조약에는 페르난두와 엔리케 2세의 딸인 레오노르 공주와의 결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두는 자신의 가신의 아내인 레오노르 텔레즈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레오노르 텔레즈는 이전 혼인을 무효화한 후 페르난두와 결혼하였다.[8][9]
이러한 행동은 포르투갈에서의 대규모 봉기로 이어졌으나 엔리케 2세와의 전쟁으로는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엔리케 2세를 쫓아내기 위해 페르난두와 비밀 조약을 맺었던 랭커스터 공작 존의 계략으로 인하여 페르난두와 엔리케 2세 간의 화의는 방해받았고 결국은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은 성공적이지 못하였으며, 1373년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1379년 엔리케 2세가 사망하자, 랭커스터 공작 존은 다시 한번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고, 포르투갈 내에도 동맹 세력을 심어두었다. 그러나 존의 군대는 페르난두의 군대뿐만 아니라 동맹의 군대에 대해서도 공격적이었다. 페르난두는 1382년 바다호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조약에는 페르난두의 딸인 베아트리스와 카스티야의 왕 후안 1세와의 결혼이 명시되어 있었다.
2. 5. 사망과 왕위 계승 문제
1383년 10월 22일, 페르난두 1세는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8] 이로 인해 엔히크 디 포르투갈 백작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보르고냐 왕가의 직계 남성 혈통은 단절되었다. 1382년 바다호스에서 맺어진 평화 조약에는 페르난두 1세의 딸 베아트리스와 카스티야 왕 후안 1세의 결혼이 명시되어 있었으나, 페르난두 1세 사후 이 조약의 이행은 미루어졌다.[8]페르난두 1세의 이복 형제이자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주앙은 왕위를 주장하며 내전을 일으켰다. 결국 주앙은 1385년에 왕위에 올라 아비스 왕조를 열었다.
3. 포르투갈 공위시대 (1383년-1385년 위기)
페르난두 1세가 1383년 10월 22일 리스본에서 사망하면서, 남성 상속자가 없어 부르고뉴 직계는 단절되었다. 살바테라 조약은 무효화되었고, 페르난두의 배다른 형제인 아비스 기사단장 주앙이 왕위를 주장했다.[3] 이로 인해 1383-1385년 위기로 알려진 내전과 정치적 혼란 시기가 시작되었다. 주앙은 1385년에 아비스 왕가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4. 유산
페르난두 1세는 1383년 10월 22일 리스본에서 사망했는데, 사인은 독살로 추정된다. 그는 남성 상속자를 남기지 않아 헨리 백작 시대(약 1112년)부터 왕위를 차지해 온 부르고뉴 직계는 단절되었다.[3] 이후 살바테라 조약은 무효화되었고, 페르난두의 사생아 동생이자 아비스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인 주앙이 왕위를 주장했다.[3] 이로 인해 1383-1385년 위기로 알려진 전쟁과 정치적 혼란의 시기가 시작되었으며, 주앙은 1385년에 아비스 왕가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페르난두의 화려한 장식의 무덤은 리스본의 카르무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시신은 포르투갈 침공 때 파괴되었으며, 산타렝에 묻혀 있었으나 끝내 되찾지 못했다.
페르난두는 귀족 주앙 로렌수 다 쿠냐(João Lourenço da Cunha)의 전 부인이자 마르팅 아폰수 텔루 데 메네세스의 딸인 레오노르 텔레스 데 메네제스와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적녀 베아트리스를 두었다. 또한, 어머니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이복 여동생인 알부케르케 백작부인 베아트리스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사생아 딸 이사벨도 있었다.[4][5]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레오노르 텔레스 소생 (1350년경 출생 - 1405년경 사망; 1372년 결혼) | |||
인판타 베아트리스 | 1373년 | 1420년 | 아버지의 상속녀. 카스티야의 왕 후안 1세와 결혼, 엔리케 2세의 적자. |
아들[6] | 1382년 | 1382년 | 4일 생존. |
딸[7] | 1383년 | 1383년 | 수일 생존. |
사생아 | |||
포르투갈의 이사벨 | 1364년 | 1395년 | 히혼과 노레냐의 백작부인, 알폰소 엔리케스와 결혼, 엔리케 2세의 사생아. |
5. 가계
페르난두 1세는 귀족 주앙 로렌수 다 쿠냐의 전 부인이자 마르팅 아폰수 텔루 데 메네세스의 딸인 레오노르 텔레스 데 메네세스와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적자 베아트리스를 두었다.[4][5] 그는 또한 어머니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이복 여동생인 알부케르케 백작부인 베아트리스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사생아 딸 이사벨을 두었다.[4][5]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레오노르 텔레스 소생 (1350년경 출생 - 1405년경 사망; 1372년 결혼) | |||
인판타 베아트리스 | 1373년 | 1420년 | 아버지의 상속녀. 카스티야의 왕 후안 1세와 결혼, 엔리케 2세의 적자. |
아들[6] | 1382년 | 1382년 | 4일 생존. |
딸[7] | 1383년 | 1383년 | 수일 생존. |
사생아 | |||
포르투갈의 이사벨 | 1364년 | 1395년 | 히혼과 노레냐의 백작부인, 알폰소 엔리케스와 결혼, 엔리케 2세의 사생아. |
참조
[1]
IPA
[2]
서적
Spain and Portugal
https://books.google[...]
J. D. Morris
[3]
EB1911
Ferdinand I. of Portugal
[4]
학술지
Escandaloso incesto na corte portuguesa do século XIV
2007
[5]
학술지
Das representações às experiências femininas vividas
2020
[6]
서적
Rainhas medievais de Portugal
A esfera dos livros
[7]
서적
Rainhas medievais de Portugal
A esfera dos livros
[8]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9]
지식백과
동 페르난두(1367~1383)
네이버 지식백과
200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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